명절이면 고향을 찾은 가족·친척들이 집안 어르신께 인사를 드리고 덕담을 나눈다.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들 앞으로 안부인사가 오고간다. 푸짐하게 차려진 밥상은 따뜻한 분위기를 더한다. 경사에 축하하기도 하지만 서운한 감정도 은연중에 깔려있다. 비싼 교통비를 지불하고 찾아온 고향이지만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조카들에게 비춰질 지갑 사정은 미안하기만 하다.
[이지경제] 이한림 기자 = 한국경제는 저성장 터널을 달리고 있다. 한국은행이 25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2.7%를 기록했다. 2014년 3.3% 이후 2년 연속 2%대 중반을 기록하고 있다. 저성장 기조는 올해에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현대경제원구원에 따르면 그동안 명절 기간 유동인구는 경제 성장률과 비례했다. 2007년부터 2015년까지 추석 유동인구 조사한 결과 최근 7년간 유동인구가 가장 많았던 2010년(4949만명)에 경제 성장률(4.5%)이 가장 높았다. 경제 성장률이 가장 낮았던 2009년(1.0%)에는 2566만명의 유동인구 수를 기록했다.
해당 자료를 토대로 추측하면 설 명절 기간에는 최대 3000만명이 고향을 방문할 것으로 예상된다. 1인가구가 증가하고 있는 변수가 있지만 경제성장률에 따른 수치 추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경제성장률 2.6%를 기록했던 2015년 추석에는 3200만명의 유동인구 수를 기록했다. 2015년은 지난해 경제성장률과 큰 차이가 없으며 추석연휴도 4일(주말포함)이었기 때문에 동일한 연휴일수인 올해 설날에도 유동인구수는 비슷할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명절만은 고향이 아니더라도 어디론가 이동하려 하고 고속도로 위에는 길게 늘어진 버스와 승용차로 만선을 이룬다. 장관(壯觀)도 두 번 보면 익숙해지는 것처럼 귀성객들에게 교통체증은 결코 보고 싶지 않은 풍경이다.
대안으로는 대중교통이 있다. 다만 대중교통은 ‘예매 전쟁’으로 불리는 승차권 예매에서 승리한 자만이 꿀잠(?)을 누릴 수 있다. 버스는 고속도로 정체와 한 몸이다. 꿀잠도 시간이 길어지면 금 같은 명절 연휴를 날리는 느낌을 받기 때문에 기차 예매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버스도 자리 확보가 치열하지만 금액을 더 지불하더라도 기차로 귀성하려는 수요자가 더 많은 이유다.
기차도 등급이 존재한다. 무궁화호, 비둘기호, 새마을호 등의 일반열차는 경유하는 노선이 많아 시간이 꽤 걸리며 자리가 비좁아 불편하다. 1순위는 역시 KTX다. 올해부터는 더 빨라진 SRT(Super rapid train) 노선이 추가됐다. 다행히도 KTX와 SRT 예매 날짜와 시간은 달랐다.
하행길 기준 경부선은 10일에 진행됐다. 호남선은 하루 뒤인 11일에 진행됐다. SRT는 12일(경부선·호남선)이다. 온라인 예매 시간은 6시부터 오후 3시까지 진행됐으며 현장발매는 각각 같은 날,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진행됐다.
한국도시철도공사는 이번 설 연휴 전체 승차권 중 인터넷에 70%, 역 창구 및 판매 대리점에서 30%를 구매할 수 있도록 배정했다. SRT도 동일한 비중을 뒀다.
온라인 예매는 현장에 직접 오지 않아도 어디서나 할 수 있기 때문에 전체 예매 중 7할을 차지하고 있지만 문제는 경쟁률이 너무 세다는 것이다. 온라인 예매 시작시간인 6시부터 10분만 지나서 로그인했을 때 대기인원은 20000만명 이상을 육박한다. 이쯤 되면 사실상 명절 예매는 실패한 셈이다. SRT는 더했다. ‘신상품’이라는 궁금증이 더해져 수요가 늘었지만 터무니없이 부족한 트래픽 문제에 서버 중단 사건을 겪었다.
SRT를 운영하는 SR 측은 즉시 사과문을 통해 “일시적 앱 오류에 따라 스마트 발권과 반환 등에 어려움을 드린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예매 전쟁 이후...비싼 표값
빈 좌석 넘치고 2년간 취소수수료 19억원
KTX 호남선 현장발매가 있던 11일, 용산역을 찾았다. 승차권 예매 창구 앞에는 흰머리가 희끗한 어르신부터 엄마 손을 꼭 잡고 있는 아이까지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오전 6시부터 온라인 예매가 시작됐고, 9시부터 현장발매가 시작되지만 대부분 미리 와서 기다린 듯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자리 전쟁이 벌어지는 인기 아이돌 콘서트 사전 현장을 방불케 했다.
역에서 만난 한 50대 남성은 “온라인으로 예매하는 방법을 알고 있지만 컴퓨터로 하는 게 어려워 자녀에게 부탁한다”며 “새벽 예매에 실패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현장으로 달려왔다”고 말했다.
한 60대 남성은 “온라인 예매 방법을 모른다”고 답하기도 했다. SRT를 알고 있냐는 질문에는 “몇 년째 명절마다 기차를 타려고 시도하고 있는데 그런 것이 있는 지 처음 알았다”고 답했다.
쭈뼛거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암표상으로 추정되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철도사업법에 따라 적발 시 벌금 1000만원 이하의 과태료 처분을 받게 되지만, 예매를 한 사람보다 하지 못한 사람이 더 많다보니 암표를 구매하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다.
또한 설 명절 승차권 가격은 용산에서 목포로 가는 KTX 호남선 하행선 특실 기준, 7만3900원(왕복 14만7800원)으로 평상시 가격과 동일하지만, 귀성길을 떠나야만 하는 서민들에게는 부담스러운 금액이다.
현장발매 대기 줄에서 대기하던 한 40대 남성에게 가격에 대한 소견을 여쭙자 “승차권 가격이 아무리 비싸도 예매를 못하는 것보다는 낫다”며 “부담스럽지만 울며 겨자 먹기라도 예매를 해야만 한다”는 간절한 답변이 돌아왔다.
한국철도도시공사는 명절만 되면 넘쳐흐르는 기차 수요를 해결하기 위해 열차 량 편성을 늘려 운영하고 있다. 올해 개통된 SRT도 같은 취지의 수단이다. 다만 예매를 하더라도 4일 내에 결제를 하지 않으면 표는 취소가 되며 결제를 했다고 하더라도 정해진 기간 내에 취소를 하지 못해 취소 수수료가 발생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25일 코레일이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홍철호 의원에게 전달한 자료에 따르면 최근 2년간 명절(설·추석)기간 동안 발권된 승차권 1526만9000매 가운데 460만7000매가 취소 또는 반환 처리된 ‘노쇼(no-show)'에 해당했다.
취소·반환 처리된 승차권은 통상 재판매 과정을 거쳐 예매하지 못한 고객에게 돌아가고 있지만 전체의 4.5%에 해당하는 69만1000매는 이조차 되지 못해 빈 좌석으로 운영됐다. 힘들게 예매에 성공했지만 막상 열차는 69만1000석이 빈 상태로 달린 셈이다.
또한 취소 수수료는 지난해 10억5500만원으로 전년대비 23.7%가 올랐다. 최근 2년간 취소수수료만 19억원에 달하는 승차권 판매 취소 수수료는 고스란히 한국도시철도공사의 몫이다.
한국도시철도공사 관계자는 “서버 폭주와 트래픽 문제는 매년 서버를 증설하며 개선하고 있고 명절 예매 취소수수료는 별도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며 “기차를 이용하는 귀성객들이 많기 때문에 책임감을 느끼고 편안한 귀성길이 되도록 물심양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한림 기자 lhl@ezyeconom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