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기획] 최빈국에서 경제 강국으로…‘한강의 기적’ 순간들
[창간 기획] 최빈국에서 경제 강국으로…‘한강의 기적’ 순간들
  • 이한림 기자
  • 승인 2017.09.11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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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경제] 이한림 이민섭 기자 = ‘쉽고 빠른 경제뉴스’ 이지경제가 창간 7주년을 맞았다. 본지는 지난 7년간 투자와 기업 정보 등 생생한 경제뉴스와 그 이면에 감춰진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에게 가감 없이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지경제는 7주년을 기념해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의 급격한 경제 성장을 상징하는 ‘한강의 기적’을 되돌아봤다〈편집자주〉.

‘한강의 기적’은 6·25 전쟁 이후부터 국제통화기금(IMF)사태 이전까지, 반세기동안 대한민국의 급격한 경제 성장을 상징하는 용어로 통칭되고 있다.

대한민국 경제는 짧은 기간 동안 세계 최빈국에서 명실상부 경제 강국으로 성장했다. 올해 국내총생산(GDP)은 1조4981억 달러로 1953년 대비(13억 달러) 무려 약 1100배를 넘었다.

대한민국 경제의 발전은 지난 195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구조 재편이 출발점이다. 삼백산업부터 반도체까지. 세계사에 기록될 경이로운 경제사이지만 명과 암은 분명했다.

제일모직공업. 사진=국가기록원

1950~60년대=복구

대한민국은 1950년 6·25 전쟁을 겪으며 국가 경제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공보처에 따르면 1953년 휴전 당시 6·25 전쟁 총 피해액은 국민 총생산의 85%에 달했다.

이에 정부는 1차 산업에 해당하는 소비재산업 복구에 공을 들였다. 미국 등으로부터 생활필수품 생산에 필요한 밀과 면화, 설탕 등을 원조 받은 것도 이 시기에 해당한다.

특히 정부는 6·25전쟁을 통해 생산시설의 75% 이상이 파괴된 면공업 등의 복구를 위해 원조 받은 물자를 값싼 가격에 기업에 팔았다.

덕분에 대한제분, 제일제당 공업주식회사(현 CJ제일제당), 금성제당 등 설탕제조업체와 삼양사, 해태제과 등 식료품 제조업체가 급성장했다. 이들은 원료를 독점하며 막대한 이윤을 남겼다.

당시는 정부 권력과 선이 닿으면 누구라도 하루아침에 재벌이 될 수 있는 비정상적인 시대였다. 미국의 원조 물자와 이를 통제했던 정치 권력 그리고 여기에 선이 닿은 특정 기업인들에 의해 재벌 체제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

국내 농업 기반 붕괴도 문제였다. 삼백산업 덕분에 시급한 당면 과제인 식량 문제를 상당수 해결할 수 있었지만 밀가루, 면화 등의 대량 수입은 농업의 생존권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울산공업지구 기공식. 사진=국가기록원

1960~70년대=발판

1960년대 국내 산업은 제조업의 비중이 점차 커지고 있던 시기다. 그러나 경공업 위주의 수출과 내수 등으로는 만성 적자 구조였던 대한민국 경제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본격적인 경제 개발 토대가 마련된 것은 정부의 ‘경제개발 계획’이 수립되면서 부터다.

‘1차 경제개발 계획(1962)’은 정부 주도하에 경공업 중심의 수출 주도형 산업을 통한 성장 전략이 주를 이뤘다. 주로 정유·비료·화학·전기기계 등의 기간산업과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에 집중적인 투자가 이뤄졌다.

‘한강의 기적’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은 ‘제2차 경제개발 계획(1967년)’이 시발점이다.

당시 정부는 제철·기계·석유 화학·조선업을 4대 국책 사업으로 설정하고,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 공업 중심으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이 기간 연평균 경제 성장률은 10.5%에 달한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주도하며 물자 수송 문제 해소에 기여한 현대건설(1947년 설립), 포드사와 합작회사로 출범해 국내 자동차 산업을 이끌었던 현대자동차(1967년 설립), 중화학공업이 꽃피는데 일조한 포항제철공업(1968년 설립, 현 포스코) 등 60여년이 지난 현재 글로벌 기업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굴지의 기업’들이 이 시기에 일제히 도드라지거나 설립됐다.

경제가 급격하게 성장했지만 반대급부도 심각했다. 제품에 대한 수요를 수입으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외자 도입의 증가와 국제수지의 만성 적자라는 문제를 떠 앉게 됐다. 빈부 격차와 대외 의존도 심화, 재벌 중심 경제 구조의 출현 등 부작용도 낳았다.

포항제철소. 사진=국가기록원

1970-80년대=부흥

중화학공업의 집중 육성은 한국 경제 부흥에 원동력이 됐음은 분명하다. 제조업 생산액에서 중화학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60년 21%에서 1970년 44%, 1980년 58%로 큰 폭으로 확대됐다. 1977년에는 수출 100억 달러라는 금자탑을 쌓기도 했다.

1970년 4월,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한국 경제의 초침은 더욱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수송, 전력 공급 문제 등이 해소되며 도소매업의 성장은 물론, 중화학공업 제품을 항만으로 나르는 작업이 수월해졌다.

아울러 포항제철의 종합제철공장(1973년 준공), 현대조선소(1972년 설립, 현 현대중공업)의 국내 최초 조선소(1974년 준공) 등이 돌아가며 무역수지가 큰 폭으로 상승했다.

아울러 글로벌 경제가 1973년과 1979년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건설업의 중동 진출, 자동차의 해외 수출 등으로 빠르게 회복하는 저력을 보이기도 했다.

현대자동차 수출 선적. 사진=국가기록원.

1980-90년대=도약

정부의 경제정책은 80년대 이후부터 제성을 띈 집중 육성에서 연구 활동 등을 장려하는 지원형으로 바뀌었다. 이는 산업 판도에도 변화를 일으켰고, 전자제품 제조에 주력하던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반도체산업에 뛰어들며 고품질의 전자제품을 직접 생산해냈다.

삼성전자는 1983년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했다. 이후 세계 반도체 시장 1위로 도약하며 현재까지 절대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한국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이다.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는 이 시기에 업계 최초로 단일기업 수출 1억 달러를 넘기도 했다.

이후 지속적으로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 TV 등 가전제품 생산 및 수출에 주력하며 삼성전자와 함께 한국을 수출 강대국의 자리로 이끌었다.

이처럼 한국 경제는 전쟁 직후 소비재산업, 중화학공업, 반도체산업 등 산업의 고도화에 따라 급격히 발전했다. 1949년 700만 달러에 불과하던 수출액이 1980년 150억560만 달러로 급격히 성장했으며, 1980년대 후반에 최초로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현은경 전국경제인연합회 연구원은 “한국 경제가 ‘한강의 기적’을 이루며 발전해오기까지는 산업계의 과학기술 개발에 대한 불굴의 도전과 진취적인 민족정신이 기여한 바가 크다”며 “산업기술에 대한 전략적 투자와 기술력의 지속적인 축적을 바탕으로 산업고도화를 이뤘고 이에 따른 성과를 바탕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했다”고 분석했다. 


이한림 기자 lhl@ezyeco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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