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뉴스] 항일의 역사 ‘봉오동 전투’ 톺아보기
[카드뉴스] 항일의 역사 ‘봉오동 전투’ 톺아보기
  • 이민섭 기자
  • 승인 2019.08.12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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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경제] 이민섭 기자 =1920년 일제강점기. 중국 만주 죽음의 골짜기 봉오동에서 독립군의 첫 승전보가 울려 퍼졌습니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봉오동 전투’가 지난 7일 영화로도 개봉됐는데요. 이지경제가 항일의 역사 봉오동 전투를 재조명 합니다.

1919년 3.1 만세운동 이후 만주지역에서 조선 독립군의 무장활동이 전개됐습니다. 이에 일본은 1920년 5월. 조선 독립군의 무장활동을 소탕 및 토벌하기 위한 작전을 펼쳤어요. 홍범도 장군과 대한독립군은 이에 맞서기 위해 북간도 지역 독립군과 연합해 대한북로독군부(독립군)를 결성했습니다.

1920년 6월 2일 만주에 있던 독립군이 국내로 들어오면서 일제 군경과 총격전을 벌이며 시작됐습니다. 다음날 오전 5시 일본군은 두만강 상류 부근에서 독립군을 찾기 위해 추격대를 조직했어요. 이후 한인 농민들이 정착한 삼둔자 마을을 수색했습니다. 일본군은 독립군을 수색 및 추격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 등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군은 일본군 추격대를 격퇴할 준비를 합니다. 당시 독립군은 신식 총기로 무장했으나 기관총 등을 앞세운 일본군과 비교하면 화력은 매우 약했죠. 이에 홍범도 장군은 의병시절 부족한 화력을 극복했던 경험을 봉오동에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분지 지형인 점을 고려해 4개 중대를 동서남북에 편성하고, 일본군을 격퇴할 준비를 했습니다.

독립군은 일본군이 매복장소로 다가오자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어요. 일본군은 지형 때문에 화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퇴각합니다. 독립군은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며 사격을 이어갑니다.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150여명이 사망하고, 200여명이 부상을 당한 반면 독립군은 4명이 전사하고 일부 부상자만 발생합니다.

봉오동 전투 이후 독립군의 사기는 더욱 높아져 1920년 10월 21일 발발한 청산리 전투까지 이어집니다. 홍범도 장군의 독립군은 역사에 기록된 첫 승전보입니다.


이민섭 기자 minseob0402@ezyeco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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