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동헌의 촌철살인] 저성장 시대 중앙은행의 역할
[주동헌의 촌철살인] 저성장 시대 중앙은행의 역할
  • 주동헌 한양대 교수
  • 승인 2017.06.05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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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동헌 교수

[이지경제] 필자는 사회생활을 한국은행에서 시작했다. 지금은 이름이 통화정책국으로 바뀐 자금부가 첫 근무 부서였는데 통화정책 실무를 경험하게 된다는 기대가 컸다.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부서 총무 업무를 맡아 궂은일을 하게 돼 ‘내가 이러려고 공부해서 한은에 들어왔나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총무로서 큰 보람을 느낀 일이 있었다. 

당시 한은 총재와 재무부 장관이 동의해 총액한도대출 규모를 대폭 축소했는데 언론은 이들이 남대문 모처에서 회동해 폭탄주를 마시며 업무협의를 진행한 끝에 쉽지 않은 정책결정에 동의하게 됐다고 보도했다. 

이들이 폭탄주에 섞어 마신 양주는 내가 부장의 업무추진비를 ‘현금화’해 남대문 시장의 불법 수입품 판매점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당시 나는 중요한 정책 결정의 은밀한 과정에 모종의 역할을 했다는 데서나마 보람을 찾은 셈이다. 20여년이 지난 지금에서 돌아보면 좀 황당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땐 그랬다.

이 황당한 얘기 속에 황당하지 않은 부분은 총액한도대출의 축소이다. 한국은행이 하는 일이 뭐냐고 일반인에게 물으면 십중팔구 돈 찍어내는 곳이라고 말할 테다. 본질적인 것 같지만 피상적인 인식이다. 한국은행은 돈을 찍어 그냥 뿌리는 것이 아니고 돈을 빌려준다. 

물론 일반인이 아니고 시중은행이나 정부에 빌려준다. 7,80년대 정부는 경제개발을 위해 필요한 재원을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활용해 손쉽게 동원하고 싶어 했고 한국은행은 물가안정이라는 본연의 목적을 위해 통화정책이 산업정책으로 활용되는 데 저항감을 갖고 있었다. 

정부가 돈을 내주라면 시키는 대로 내준다는 의미에서 한국은행을 ‘재무부의 남대문 출장소’라고 비아냥대기까지 해서 중앙은행의 자존심이 크게 상했던 시절이다. 그러나 8,90년대 물가안정이 중요한 정책과제로 인식되면서 중앙은행 독립성이 강조되고 이에 상응해 정책수행 방식의 변화도 추진되게 됐는데 대표적인 것이 총액한도 대출의 축소였다.

중앙은행의 대출제도는 흔히 교과서에 ‘재할인 창구(discount window)’로 언급된다. 은행이 담보로 획득한 어음을 중앙은행에 가져 오면 중앙은행은 정해진 재할인율로 어음을 매입함으로써 대출을 집행한다. 이 경우 재할인율을 조정해 재할인 수요를 중앙은행이 조절할 수는 있으나 근본적으로 대출총량을 조절할 수는 없다. 

한국은행은 재할인 제도를 개편해 대출 총액을 제한하는 ‘총액한도 대출제도’를 도입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축소함으로써 통화정책 수행방식을 선진화 또는 효율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앞서 언급한 필자의 에피소드가 있었던 1996년을 전후해서 10조원에 가까웠던 총액한도대출 한도가 3조원대까지 축소됐다.

그러면 이후 한국은행의 대출제도는 희망했던 선진화의 길을 갈 수 있었을까? 총액한도대출제도는 ‘금융중개지원대출’로 이름이 바뀌어 유지되고 있는데 그 한도가 25조원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짐작하는 대로 한국 경제가 겪은 두 차례의 위기가 그 이유이다. 1998년 외환위기로 총액한도대출 한도는 2002년까지 12조원으로 다시 올라갔다. 

이후 점진적으로 한도를 축소하려는 시도에 따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7조원대까지 내려갔으나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다시 확대돼 이제는 25조원으로 크게 확대된 것이다. 사실 필자는 사회 초년병 시절의 경험으로 총액한도대출의 확대에 불편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2013년 총액한도 대출의 일부로 도입된 기술형 창업지원 프로그램은 창조경제라는 이름하에 창업을 독려하는 정부 정책을 정부 재원으로 하지 않고 발권력이라는 손쉬운 자금조달 수단을 동원한다는 비판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다르게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단기 정책금리 중심의 통화정책이 한국 경제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다. 최근 한국경제는 저성장의 늪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다. 

2015년과 2016년의 연간 실질경제성장률은 두 해 모두 2.8%에 그쳤으며 물가상승률도 각각 0.7%와 1.0%로 매우 낮았다. 문제는 인구 고령화, 더딘 산업구조 개선, 불안정한 고용시장 등 구조적 문제들이 겹치면서 저성장 기조가 고착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과거 통화정책은 비판받을 측면도 있으나 나름대로 시대적 과제에 대응해 수행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70년대에는 경제개발을 위한 유동성 지원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고, 물가안정이 한국 경제의 최대 현안이었던 8, 90년대에는 중앙은행의 물가안정 의지를 반영하는 정책이 필요했다. 2000년대에는 빈번한 대내외 위기극복에 과감하게 대응하는 정책이 필요했다. 이제 한국은행은 중앙은행으로서 본연의 책임을 다하면서도 한국 경제가 저성장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구조적 문제에 대응하는 묘책을 고민해 볼 때다. 

이러한 측면에서 최근 고승범 금통위원이 고용을 늘리는 중소기업에 금융중개지원대출을 확대해야 한다고 언급한 것은 한국은행이 이러한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면에서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고용뿐만 아니라 다른 구조적 문제들에도 정책적 방안을 제시하는 적극적인 중앙은행의 신용정책을 기대해 본다.

Who is?

한양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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