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동헌의 촌철살인] 미끄럼틀 규제를 넘어서
[주동헌의 촌철살인] 미끄럼틀 규제를 넘어서
  • 주동헌 한양대 교수
  • 승인 2017.09.04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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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경제] 대학이 자신의 교육철학을 알릴 수 있는 방법엔 뭐가 있을까? ‘이거, 참, 한양대 에리카 경상대학의 교육철학은 참 좋은데, 뭐라고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고민하던 학장님은 어떤 상징물을 경상대 로비에 설치하기로 했다. 그 상징물은, 바로 미끄럼틀이다. 놀이터에 있는 그 미끄럼틀 종류인 것은 맞는데, 놀이터의 그것보다는 많이 고급스럽다. 몇 년 전 삼성동 코엑스에 있는 메가박스도 극장을 리노베이션 하면서 고급스런 양철로 제작된 기다란 미끄럼틀과 뱅글뱅글 돌아내리는 미끄럼틀을 설치했다. 필자가 재직 중인 대학의 미끄럼틀도 메가박스의 그것과 비슷한 것이다.

영화를 보러 메가박스에 가면 나는 늘 그 미끄럼틀이 타고 싶었다. 놀이터 미끄럼틀도 한 번 타보면 웃음이 터지는데 그렇게 길고 다이내믹한 미끄럼틀을 타면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그런데 내가 영화를 보러 갈 때마다 항상 미끄럼틀 입구가 닫혀 있어 탈 수가 없었다. 만들어 놓고 쓰지 않을 것이라면 뭐하려고 설치했나 궁금했다.

그런데 그 궁금증이 우리 대학에도 미끄럼틀을 설치하고 나서야 풀렸다. 우리 대학의 미끄럼틀도 2층에서 한 바퀴를 돌아 로비로 내려오는 멋지고 다이내믹함을 가지고 있는데 설치하고 나서 몇 달을 입구를 막아놓았다. 미끄럼틀의 설치비용이 결코 작지 않았는데 왜 사용하지 않는가 싶어 관계자에게 물었더니 놀라운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건물 내 미끄럼틀은 법에 정해진 특수 구조물이라 일단 설치 허가를 받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허가를 받아 설치하고 나서는 안전 위험의 가능성이 있는 구조물이므로 관리자 2인의 감독 하에 개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낮에 영화를 보러 가서 코엑스의 미끄럼틀을 한 번 탄 일이 있었는데 메가박스 직원이 위와 아래에서 안내를 해 주었던 기억이 났다. 종일 본 것은 아니라 모르겠으나 메가박스도 미끄럼틀을 저녁 이후나 주말에 개방하자고 직원을 배치해서 비용을 들이느니 미끄럼틀을 그저 ‘상징물’로만 두기로 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러니 돈 없는 학교야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미끄럼틀을 방치할 수만은 없었던 학장님은 방법을 찾았는데 바로 CCTV의 설치였다. 미끄럼틀의 입구와 출구에 CCTV를 설치하고 이를 행정실에서 모니터링하면 안전요원이 있는 것으로 인정해 주겠다는 당국의 허락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끄럼틀이 개방됐다. 단 개방시간은 행정실에 직원이 근무하는 9시부터 5시까지. CCTV가 설치되고 나서도 필자는 학생들이 미끄럼틀을 즐기는 일을 그리 자주 보지 못했다. 경비 일을 보시는 분께 여쭤보니 그래도 낮에는 꽤 타는 학생들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2층 강의실에서 수업 중에 그 신나는(!)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는 학생들이 소리를 지르면 수업에 방해가 될 수 있어 자제를 시키는 편이란다. 낮에는 수업에 방해가 돼 못타고, 밤에는 안전 확보 방안이 없어 못타고, 결국 학교의 미끄럼틀도 그저 ‘상징물’로 남게 된 셈이다.

다시 물어보자. 대학에서 교육 철학을 드러내는 방법엔 어떤 것이 있을까? 아마도 손쉬운 방법 중 하나는 그 철학을 교훈으로 만들어 커다랗게 벽에다 써 붙이는 것일 테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안다. 제아무리 큰 글씨로 써 붙여 본들 그 철학을 체화하는 것은 고사하고 기억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우리 대학의 학장님은 학생들이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학생들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 철학을 벽에 써 붙이는 대신 미끄럼틀을 통해 생활의 공간에서 체험하고 느끼기를 바라셨다.

고백하면 필자도 학교에 미끄럼틀을 설치한다고 할 때 내심 기대가 컸다. 필자는 통상 퇴근을 8시 이후에 하는데, 늦은 시간 퇴근길에 2층에서 로비로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올 심산이었다. 미끄럼틀 설치 기념식에 한 번 타 보았는데, 내려오면서 와 소리도 저절로 나오고 미끄럼틀에서 일어나면서는 얼굴에 함박웃음이 머금어졌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지친 마음의 스트레스를 푸는 데 그만한 일이 없겠다 싶었다. 하지만 지금 미끄럼틀은 벽에 써 붙인 글씨처럼 대학 로비에 덩 그라니 놓여있을 뿐이다.

여름에 미국에서 어느 강가에 놀러 간 일이 있다. 강변에는 사람들이 너무 깊은 곳에 가지 못하도록 안전 설비가 돼 있었고 ‘Swim at your own risk’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강변을 즐기는 권리도 중요하고 안전도 중요하다. 위 경고 문구는 다소 부족해 보일 수도 있겠으나 당국이 안전 확보의 의무를 이행하면서도 시민의 양식을 믿는 범위에서 자율성을 보장하는 해법을 모색한 결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안전사고로 감당하기 쉽지 않은 비판에 직면하다 보니 합리적 수준을 넘어서는 규제를 부과하고 있는 당국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미끄럼틀 정도는 ‘자기 위험’ 하에 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창조 구호를 외친다고 학생들이 창조적이 되는 것은 아닐테니까.

Who is?

한양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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