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그러진 IT 강국①] “IT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일그러진 IT 강국①] “IT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 이어진
  • 승인 2013.06.07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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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이라도 되고 싶다” 울분 토로, ‘월화수목금금금’은 예사


[이지경제=이어진 기자] 최근 갑과 을에 대한 논란이 거세다. 남양유업의 대리점 압박, 편의점 CU 점장의 자살 등의 사건으로 인해 핍박받는 ‘을’을 살리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국내 전 산업에 걸쳐 갑을 관계 개선의 움직임이 보이고 있지만 유독 이 논란에서 소외되고 있는 분야가 있다. IT다. IT강국이라는 허울뿐인 이름에 가려져 자신들의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다. ‘을’이라도 되고 싶다고 하소연하는 그들은 IT강국에 속한 'IT노동자‘다. 

◆과로에 폐 절제한 IT노동자, “죽음으로 권리 외쳐야 하는 것인가”

흔히 우리나라를 IT강국이라 말한다. 반만 맞는 말이다. 스마트폰, 태블릿PC 등 스마트 단말은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확산됐다. IT서비스들도 마찬가지다. 1990년대 후반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여러 IT서비스 업체들이 대거 등장했고, 이중 몇몇 업체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열악했던 게임 시장 또한 인터넷 보급률 확산 등으로 인해 10여년 만에 10배 가량 성장했다. 하지만 이 같은 IT업계 성장의 이면에는 개발자들의 피와 땀이 있다. 

지난 2009년 IT업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N사에 근무하고 있던 양모씨의 일이다. 

양 씨는 지난 2006년부터 2008년까지 N사에서 근무했다. 정규직이었으며 SI시스템 개발 업무를 하며 지냈다. 양 씨에 따르면 2년 반 가량 N사에서 총 8,000여 시간을 넘게 근무했다. 주말 없이 일한다 쳤을 때 하루 평균 11시간 이상의 살인적인 근무였다. 
 
살인적인 근무를 반복하던 양 씨는 2년 반 동안의 과로로 인해 폐렴 진단을 받았지만, 항생제 치료가 전혀 듣지 않아 오른쪽 폐의 절반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폐렴 판정을 받기 전 양 씨는 그 어떤 병력도 없었다. 폐를 절제한 근본적인 원인이 과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술 이후 요양을 받던 양 씨에게 회사는 삭감된 연봉계약서를 들이밀었다. 그동안 벌어진 살인적인 야근 시간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양 씨는 N사를 상대로 민사 소송을 진행했다. 개인이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양 씨에 따르면 회사는 재직 중인 동료직원들을 불러 위증을 요구했다. 회사 측 사람은 양 씨를 찾아와 야근한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며 개인적으로만 사과했다. 사과 내용을 녹취해 법원에 증거로 제출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3년 간의 민사 소송 끝에 올해 3월 양 씨는 법원으로부터 겨우 30%의 초과 근무 시간만을 인정받았다. 2년 간 하루에 약 2시간 정도의 야근만 인정받은 셈이다. 

1심에서 패소한 N사는 양 씨를 상대로 상고했다. 2심에서는 국내 유명 대형 법무법인을 끌어들였다. 양 씨 또한 상고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 6일 국회의원회관에서 민주당 장하나 의원과 한국정보통신산업노동조합(이하 IT노조)가 주최한 ‘을이라도 되고 싶은 IT노동자 증언대회(이하 증언대회)’가 열렸다. 

이날 증언대회에 참석한 양 씨는 “폭탄이라도 들고 N사를 폭파시키고 사람이 죽어야 이 사회의 주목을 받고 이 사건에 대한 수사가 시작될까, 죽음으로 권리를 주장한 편의점 주, 건물에서 투신한 어느 개발자처럼 나도 죽음으로 권리를 외쳐야 하는 것인가”라며 울분을 토했다. 

이어 “정상적인 국가라면 이런 일들이 발생할 수도 없고 발생해서도 안 된다. 연간 근무시간을 1,900시간으로 줄인다고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불법 시스템을 운영하는 회사부터 조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살인적인 근무시간, “개발자는 야근만”

IT노동조합이 5월1일부터 20일까지 1,000여명의 개발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 IT노동자들의 평균 주당 근로시간은 57.3시간으로 나타났다. 지난 2004년 실시된 설문조사에서는 주당 근로시간이 57.79시간으로 집계됐다. 9년의 시간 동안 IT노동자들의 근로시간은 줄어들지 않은 셈이다. 또 주당 근로 시간이 60시간 이상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34.9%나 된다. IT노동자들 10명 중 3명 꼴로 하루 12시간 이상 일을 하는 것이다.

상당한 비율의 IT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과 근무시간을 집계하는 업체들은 손에 꼽을 정도다. IT노조의 실태조사 결과 직장에서 초과근로시간에 대해 정확하게 집계하고 있다는 응답은 10.8%에 불과하다. 집계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75.5%, 초과근로시간과 관계 없이 일정시간으로 처리한다는 응답은 13.7%로 나타났다.

나경훈 IT노조위원장은 “IT노동자들의 근로시간을 보면서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단어는 야근이다. IT노동자들을 마치 기계인 것처럼 생각한다”며 “이는 창의성에 대한 몰이해를 기반으로 한 산업 풍토에서 나온 문제”라고 현 상황을 진단했다.

이어 “이런 문제는 증언에 참석한 다른 노동자들처럼 건강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고 있으며 SW 질의 하락을 초래한다”며 “젊은 노동자들이 IT업계를 기피하고 이 때문에 산업에 적절한 인력이 수급되지 않는다. 산업 풍토가 결국 산업을 망가트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SW개발환경위원회 이재왕씨는 “개발자는 공장 조립라인 노동자, 건설근로자들처럼 취급받는다”며 “공장라인은 밤 늦게까지 가동하면 생산량이 증가하지만, SW는 R&D공정과 비슷해 오래 일한다고 해서 좋은 제품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창의적이고 열정적인 환경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목소리 내기도 어려운 현실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은 대부분 노조가 활성화돼 있다. 쌍용자동차 사건만 놓고 보더라도, 국내 노조들이 연합해 한 목소리로 노동자 구하기에 나선다. 하지만 IT업계에서는 이런 일을 찾아볼 수가 없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목소리를 높여 현 상황을 고치고 싶어도, 생업을 외면할 수 없어서다.

이날 증언에 참석한 한 IT노동자는 현충일임에도 불구하고 출근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증언했다. 다른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현충일 등 공휴일에 쉬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지만 IT업계에서는 휴일에도 지시가 내려오면 어쩔 수 없이 일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또 그들이 노동 현실에 대해 규탄할 수 없는 이유는 IT업체들의 상당수가 ‘병정무기’에 속하는 영세한 업체들이라는 점이다.

삼성SDS, SK C&C 등 굴지의 IT SW업체들을 제외하고는 SW로 큰 매출을 올리는 업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삼성SDS와 LG CNS, SK C&C 등 국내 내로라 하는 SW대기업들의 연간 매출은 1조원이 훌쩍 넘는다.

대기업들은 매년 SW를 통해 조단위의 돈을 벌어들이고 있지만, 국내 대다수의 SW업체들은 영세하다. 2011년 기준 매출 100억원 미만의 IT업체는 전체 IT서비스 업체 중 90%에 달한다. 10억원 이하의 영세한 IT업체는 50%다. 업체들이 영세하고 직원 규모도 적다보니 다른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같이 단합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이 다소 어려운 것이다.

다른 한 IT노동자는 “다들 생업에 치여서 단합하고 모일 수가 없다. 야근과 주말 출근, 업무의 연속이다. 일단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이 일을 일단 해야 하지 않는가”라며 “작은 업체일수록 그런 어려움은 더욱 심하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어진 bluebloodmh@ezyeco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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