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 뜯어고친 대한민국 ‘개헌역사’ 해부
아홉 번 뜯어고친 대한민국 ‘개헌역사’ 해부
  • 조지은
  • 승인 2013.01.11 14:4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지뉴스=정치팀] 돌이켜 보면 참으로 숨 가쁜 역사였다. 헌법은 권력자의 독재수단으로 악용됐으며, 개헌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권력집단은 언론을 장악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려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렀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끔찍한 역사는 수없이 반복됐다. 9번의 개헌에서 7번이나 위헌적인 개헌이 자행되는 동안 국민은 무엇을 했던 걸까? 혹 국민적 무관심으로 인한 비극은 아닌지, 60년 대한민국 개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봤다.

역대 대통령 중 몇몇은 폭력과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거나, 감언이설로 국민을 속여 투표장으로 끌어냈다. 국민들은 정작 무엇이 바뀌는지는 모르고, ‘꼭 바꿔야 한다니까’ ‘뭔가 더 좋아질 것 같으니까’라는 막연함으로 소중한 한 표를 던졌다. 이젠 다르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꼼꼼히 ‘묻고 따지는’ 시대 아닌가? 하물며 나라의 근본을 바꾸는 일이다. 몇 번을 묻고 따져도 부족하지 않을까?

안 되면 밟아서라도

1948년 제헌국회는 헌법기초위원회를 구성해 '정부형태는 의원내각제로 하고, 국회의 구성은 양원제로 한다'는 내용의 헌법초안을 작성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과 미군정당국은 이에 격렬히 반대했다. 이들은 '정부형태는 대통령제로 하고, 국회의 구성은 단원제로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결국 이 전 대통령의 주장대로 임기 4년의 간선제 선출방식의 대통령제와 단원제가 채택, 의원내각제 중에서는 국무위원제와 국무총리제가 채택됐다.

1950년 5월30일 국회의원 총선에서 대패한 이 전 대통령은 간선으로는 재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 양원제와 대통령직선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제출했다.

1952년 1월18일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에 대한 표결은 찬성 14표, 반대 143표, 기권 1표로 결과는 부결이었다. 이 전 대통령의 미약한 국회 지지세력이 드러났다.

이 전 대통령은 부결된 개헌안을 다시 제출해 폭력과 온갖 불법수단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자유당과 국회 외부세력 동원, 개헌안 부결반대 민중대회 등의 관제데모를 전개해 국회에 압력을 가했다.

정부는 야당계 거물인 장면 국무총리를 해임하고, 내각책임제 추진파인 서민호 무소속 국회의원을 구속했다. 50여 명의 국회의원이 탄 통근버스가 헌병대에 강제 연행되는가 하면, 국제공산당과 관련이 있다는 혐의로 10명의 국회의원이 붙잡히는 등 정국은 그야말로 난리 통이었다.

그해 7월4일 국회는 찬성 163표, 기권3 표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것이 그 유명한 ‘발췌개헌' 사건이다. 이 전 대통령은 같은 해 실시된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이 전 대통령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54년 두 번째 개헌을 시도한다. 이 전 대통령과 자유당은 3선을 하고자 했으나, 당시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는 4년이며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고 제한하고 있었다. 이에 이 전 대통령과 자유당은 ‘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 철폐’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마련했다.

결과는 재적의원 203명, 참석의원 202명 중 찬성 135, 반대 60, 기권 7표. 개헌이 가능한 의결정족수는 3분의 2 이상이므로 개헌안이 가결되기 위해서는 헌법 조문상 136명 이상 찬성을 요건으로 했다. 국회부의장은 부결을 선포했다.

이에 물러날 자유당이 아니었다. 자유당은 4사5입을 적용하여 135.33명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으며 0.33이란 자연인은 존재할 수 없으므로, 반도 안 되는 소수점 이하는 삭제하는 것이 좋다는 이치에 맞지 않은 이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른바 두 번째 개헌인 ‘사사오입’ 사건이다.

개헌안은 결국 통과됐으며 이 전 대통령은 3선의 뜻을 이뤘다. 이 전 대통령은 이 같은 위헌적인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직을 연명했다.

대통령 임기 연장 도구로 헌법사용, 위헌적 방법도 불사
국회의결·국민투표 모두 거친 것 6차 개헌과 현행헌법 뿐

1960년 4·19혁명으로 이 전 대통령이 하야하고, 허정 과도정부가 들어서면서 의원내각제 형태의 제3차 개헌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합헌적 절차에 의한 개정이었다.

같은 해  3·15부정선거의 주모자들과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군중을 살상한 자들을 처벌하는 헌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제4차 개헌이 이뤄진다. 당시 이에 대해 법의 기본원리에 반하는 위헌이라는 논란이 많았다.

1961년 5·16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국회와 지방의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의 활동을 정지시켰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이름을 바꿨으며,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국회의 의결 없이 위헌적인 방법으로 헌법안을 확정했다.

이때 처음으로 국민투표제가 헌법 개정절차의 필수 요건으로 등장했다.

1967년 6월8일 국회의원선거에서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개헌선인 3분의 2를 넘는 의석을 확보했다. 박 전 대통령은 3선을 가능하게 하는 개헌안을 제출하고 새벽 2시 국회 제3별관에서 기습적으로 통과시켜 국민투표로 확정했다. 여섯 번째의 일명 ‘날치기’ 개헌이었다.

집권 11년째인 1972년 10월17일 박 전 대통령은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초헌법적인 초치인 ‘10·17비상조치’를 단행했다. 국회의 권한을 비상국무회의가 대행하며, 헌법을 개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비상국무회의가 헌법개정안을 의결하고, 개헌안은 국민투표로 확정됐다. 일곱 번째로 개정된 헌법이 바로 ‘유신헌법’이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한을 쥐어줬다. 하지만 1979년 10·26사태로 19년 박정희 독재정권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박정희 독재정권의 종식으로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활활 타올랐다. 그러나 1979년 12·12사태로 시작된 군사정권에 의해 처참히 짓밟힌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0년 5월 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를 단행해 전국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이의 본보기로 5월18일 광주에서는 끔찍한 대학살의 피바람이 불었다.

전 전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됐으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마련한 헌법개정안을 국민투표로 확정시켰다. 대통령의 임기는 7년으로 연장했다. 전 전 대통령은 ‘행복추구권’이라는 국민의 기본권을 헌법 조문에 집어넣었다.

개헌도 ‘날치기’

1987년 전 전 대통령의 군사 장기집권을 저지하기 위한 ‘6월 민주항쟁’이 범국민적으로 일어났다. 이 결과 대통령직선제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헌법개정안이 국회에서 의결돼 국민투표로 확정됐다. 헌정사상 최초 여야 간 합의로 제9차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때 처음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헌법 전문에 등장했으며, 대통령 임기 5년의 직선제가 도입돼 모든 국민은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게 됐다. (사진=국가기록원)   


조지은 jieun@ezyeconomy.com

  • 서울특별시 서초구 동광로 88, 2F(방배동, 부운빌딩)
  • 대표전화 : 02-596-7733
  • 팩스 : 02-522-7166
  •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민이
  • ISSN 2636-0039
  • 제호 : 이지경제
  • 신문사 : 이지뉴스
  • 등록번호 : 서울특별시 아01237
  • 등록일 : 2010-05-13
  • 발행일 : 2010-05-13
  • 대표이사·발행인 : 이용범
  • 편집인 : 이용범, 최민이
  • 편집국장 : 임흥열
  • 이지경제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이지경제.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ezyeconomy.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