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뻔뻔한 전범기업의 실체
<1화>아시아의 피를 먹고 자란 전범기업 ‘미쓰비시그룹’
2부 뻔뻔한 전범기업의 실체
<1화>아시아의 피를 먹고 자란 전범기업 ‘미쓰비시그룹’
  • 윤병효 기자
  • 승인 2015.05.08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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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군대에 군함, 전투기 공급…조선인 강제노동자 10만명 착취

일본이 또 다시 한국인들의 분노를 들끓게 하고 있다.

지난해 일본이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한 메이지산업혁명 23곳의 유적지가 선정이 유력시 되고 있다. 문제는 이 유적지 중 최소 7곳이 전범기업들의 사업장인데다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이 노역을 치러야 했던 가슴아픈 곳이란 점이다.

전범기업 사업장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문제를 방치했다가는 향후엔 일본 전범기업들이 아시아의 산업발전을 이끈 원동력이란 헛소리까지 나올 판이다.

이러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일본 전범기업들의 실체를 명확히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최악의 전범기업으로 꼽히는 미쓰비시그룹을 알아본다.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 미쓰비시
미쓰비시그룹의 모태는 1870년 창업자인 이와사키 야타로가 반란군을 제압한 공으로 정부로부터 나가사키 조선소를 넘겨 받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와사키는 3개의 마름모를 뜻하는 미쓰비시(三菱) 이름을 붙여 미쓰비시중공업나가사키조선소를 설립했다. 이후 미쓰비시조선은 정부의 강력한 지원에 힘입어 급성장해 사업 분야를 조선, 제지, 상사, 광업, 은행, 전기 분야로 확대했다.

이 시기 일본은 제국주의 야욕을 품고 한반도를 지배할 목적으로 중국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승승장구한다.

전쟁이 본격화 되던 1934년 나가사키 조선소를 모태로 미쓰비시그룹 중에서도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미쓰비시중공업이 설립됐다.

미쓰비시중공업은 당시 세계 최대 전함인 무사시호와 진주만을 폭격한 제로센 전투기를 만드는 등 앞선 기술력으로 군에 핵심무기를 공급하며 그룹을 일본 최대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 2차 대전 당시 미쓰비시중공업이 건조한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전함 무사시호의 모습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연합군사령부가 전쟁에 적극 가담한 책임을 물어 미쓰비시그룹을 뿔뿔이 해체시켰다.

하지만 1960년대 들어 일본과 미국 관계가 순화되면서 전범기업 규제도 완화돼 해체됐던 미쓰비시그룹은 재결합했다. 기존 직원들의 직위와 퇴직금 등도 그대로 승계됐다.

이것만 보더라도 전쟁 전의 미쓰비시그룹과 지금의 미쓰비시그룹은 한 통속이라는 사실이 명확하다.

◆강제징용 피해자 머리 위로 떨어진 원폭
미쓰비시그룹은 일본 전범기업 가운데 가장 많은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을 데려다 썼다.

일제는 1939년 7월 8일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한반도에 거주하는 기능공들을 모집, 일본으로 이주시켰다.

그러다 태평양전쟁이 고조되자 1944년 8월 8일 ‘반도인 노무자의 이입에 관한 건’을 결의하고 국민징용령을 적용해 기능공에 상관없이 조선인들을 강제징용하기 시작했다.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산에서 나무를 하고 내려 오는 길에 순경에 붙잡혀 일본으로 강제징용될 정도로 마구잡이식으로 진행됐다.

수 많은 조선인들은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의 시모노세끼로 운송돼 미쓰비시 사업장이 있는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배치됐다.

일본 시민운동가들이 펴낸 ‘전쟁책임 연구’ 자료에 따르면 미쓰비시그룹에만 10만명의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의 생활은 노예나 다름없었다.

2012년 대법원 판결에 나와 있는 강제징용 피해자 증언을 보면 이들은 일본군과 경찰의 감시 아래 조선에서 일본의 미쓰비시 사업장으로 옮겨졌다.

피해자들은 월 2회밖에 휴일이 없었고 매일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철판 자르기, 동관 구부리기, 배관일 등을 했다. 식사는 양이나 질이 현저히 부실했으며, 숙소도 좁은 다다미방에서 10~12명이 생활해야 했다. 숙소 주변에는 헌병과 경찰이 삼엄한 감시를 해 탈출은 엄두도 못냈다.

1945년 피해자들은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던 8월 6일 그 꿈은 산산조각 났다.

미군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한 것이다. 원폭은 미쓰비시 조선소를 목표로 했고, 그곳에서 아무것도 모른채 일만하던 10만의 조선인들은 그 피해를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다.

정부기관 대일항쟁위원회에 따르면 원폭으로 인한 조선인 사상자는 7만명, 이 가운데 4만명은 사망하고 나머지 생존자도 심각한 후유증을 앓았다고 한다.

당시 생존자들과 유족들은 미쓰비시를 상대로 손해보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미쓰비시는 콧방귀만 뀌고 있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이미 피해자 보상이 끝났다는 것이다. 일본 법원 역시 같은 논리로 손해보상 요구를 기각하고 있다.

하지만 2012년 5월 대법원은 한일협정이 일본군 징용자에 대한 보상만 포함할 뿐 전범기업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것은 포함하지 않고 있다며 미쓰비시중공업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보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를 토대로 지난 4월 21일 미쓰비시 강제징용 피해자를 포함한 920명의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기업에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제기했다.

이 소송을 주관한 아시아태평양전쟁희생자한국유족회는 승소 판결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며 이를 미국 사법부와 연계해 전범기업들의 미국내 자산을 압류하는 식으로 압박할 것이라고 계획을 밝혔다.

◆니콘도 전범기업 출신
미쓰비시는 39개의 홀딩스 자회사를 갖고 있다. 자회사 한 개가 다시 여러 손자회사 또는 증손회사를 갖고 있는 형식이다. 미쓰비시그룹의 총 계열사 수는 400여개로 알려져 있다.

계열사 숫자만큼 손을 대지 않은 사업이 없다.

요즘 수입맥주 인기와 더불어 판매가 높은 기린맥주가 미쓰비시 계열이며, 국내 카메라시장 점유율이 높은 니콘도 같은 계열이다. 특히 니콘은 미쓰비시중공업이 군함과 전투기 등을 만들 때 망원경 등을 함께 개발한 것이 모태가 됐기 때문에 원죄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상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미쓰비시중공업 제품도 한국시장에 상당히 진출해 있다.

대표적으로 2009년 아리랑 3호기가 미쓰비시중공업의 추진체로 발사됐으며, 당진화력발전소 9‧10호기 발전기도 미쓰비시중공업 제품으로 설치됐다.

▲ 미쓰비시그룹의 3가지 원칙 사회에 대한 기업의 책임, 청렴성과 공정성, 사업을 통한 국제이해

미쓰비시그룹은 4대 회장인 고야타 이와사키의 신조를 바탕으로 3가지 원칙을 갖고 있다. 사회에 대한 기업의 책임, 청렴성과 공정성, 사업을 통한 국제이해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첫 번째로 꼽은 사회에 대한 기업의 책임을 미쓰비시그룹은 얼마나 잘 실천하고 있는지 꼽씹어 보길 바란다.  

[이지경제=윤병효 기자]


윤병효 기자 ybh@ezyeco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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