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VC, 사내부서 투자 포함 시 벤처자금 비중 높아 현실과 괴리
금산분리 완화 시 금융위험 전이 가능, 동양사태 경고 사례 존재
혁신 생태계 구축 우선 필요…경제력 집중 해소와 기술 보호 강조

20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공정거래와 금산분리제도의 정책 방향과 과제’ 세미나에서 관계자들이 발표 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이지경제
20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공정거래와 금산분리제도의 정책 방향과 과제’ 세미나에서 관계자들이 발표 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이지경제

은행법학회와 경제와정의포럼은 20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공정거래와 금산분리제도의 정책 방향과 과제’를 주제로 공동정책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세미나에는 주병기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해 학계, 금융계, 산업계 전문가들이 참석해 금산분리 완화 논의의 문제점을 집중 조명했다.

김자봉 은행법학회 회장은 개회사에서 “새 정부가 AI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 글로벌 선도기술 확보를 통한 질적 성장으로의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며 “대기업과 벤처기업 모두가 R&D 혁신 공동체에서 하나가 될 때 가장 큰 에너지가 발현된다”고 강조했다.

주병기 위원장은 축사를 통해 대기업 집단 내 산업자본의 과도한 금융 지배가 1997년 외환위기를 초래한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지적하며 “현재도 총수 일가의 지배력 확장과 경제력 집중 심화에 대한 우려가 상존하고 있어 금산분리 제도 완화 논의는 충분한 국민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신중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 韓 CVC, 전략적 투자 아닌 재무적 투자...정부 통계도 ‘왜곡’

강신형 충남대 경영대학 교수는 ‘우리나라 CVC의 현주소와 한계’를 주제로 한 발표에서 우리나라의 CVC 정의와 운영 방식이 글로벌 기준과 크게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다.

미국에서 CVC는 자금의 출처가 기업이면 운용 형태와 관계없이 모두 CVC로 정의하지만, 우리 정부는 일반지주회사 산하의 투자회사 형태만을 CVC로 분류하고 있다. 강 교수는 “이는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특이한 케이스”라고 지적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네이버, 현대차, GS리테일 등이 내부 벤처투자팀을 통해 직접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사내부서 CVC’ 형태가 상당한 규모를 차지하고 있다. 사내부서 CVC의 투자 규모는 2021년 2조5000억원, 2022년 2조7000억원에 달했으나 중소벤처기업부 통계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강 교수는 “중기부는 투자회사를 통한 투자만 집계해 2023년 CVC 비중을 22% 수준이라고 발표했지만, 사내부서 CVC까지 포함하면 전체 벤처투자에서 기업 자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30%를 넘는다”며 “정부 통계와 현실 간 괴리가 매우 크다”고 비판했다.

더 큰 문제는 독립법인 CVC가 전략적 투자자가 아니라 재무적 투자자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2023년 조사 결과 투자회사 형태의 CVC 중 절반 정도만이 전략적 목적의 투자자로 분류됐다. 강 교수는 “전략적 투자자라고 해도 인센티브와 업계 평판 때문에 재무적 투자 수익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우리나라 정부는 기업사나 투자회사가 전략적 투자자인 것을 가정하고 정책을 설계하는데 그 가정 자체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반면 미국의 경우 스탠퍼드대 박사과정 학생이 2020년 S&P500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벤처투자 이력이 있는 94개 기업 중 74개를 인터뷰한 결과, 독립 법인 형태는 5개(7%)에 불과하고 69개(93%)는 모기업 보유 현금에서 직접 투자하는 사내부서 형태였다. 미국 기업들은 전부 내부에서 부서를 만들어 자체 보유 현금에서 예산을 할당해 투자하는 형태다.

강 교수는 일반지주회사 164개를 조사한 결과, 공정거래법에서 정의하는 CVC(일반지주 100% 자회사인 벤처투자회사)에 해당하는 것은 14개에 불과하고, 나머지 32개는 지주체제 밖에서 투자회사를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GS의 경우 GS건설이, 롯데의 경우 롯데호텔이 투자회사를 보유하는 식이다. LG는 아예 미국에 LG테크놀로지벤처스를 설립했다.

강 교수는 “공정거래법상 CVC 행위 제한은 쉽게 우회할 수 있어 유명무실하다”며 “행위 제한이 아니라 공시나 관리감독 기능 강화 형태로 규제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제안했다.

CVC와 M&A 활성화의 관계에 대해서도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미국의 경우 VC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의 90% 이상이 M&A로 회수되지만, 한국은 40%에 불과하다. 강 교수는 “CVC 투자가 M&A 활성화에 긍정적 기능을 할 수 있지만, 킬러 인수(Killer Acquisition) 같은 부정적 측면도 있다”며 대기업이 경쟁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을 인수해 프로젝트를 중단시키고 독과점 지위를 강화하는 사례도 보수적으로 추정해 5~7%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기술 탈취와 스타트업의 대기업 의존 심화 등 부정적 측면을 억제하려면 민간 VC의 중재자 역할이 핵심”이라며 “대기업의 자본시장 지배력을 높일 게 아니라 민간 VC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이지경제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이지경제

◆ “AI 투자는 핑계, SK 총수 지배력 유지가 목적”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AI투자, 금산분리, 배임’을 주제로 한 발표에서 최근 제기되는 금산분리 완화 논의가 AI 투자와는 전혀 무관하며, 특정 재벌 총수의 사익 추구에 불과하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박 교수는 “AI 투자 등 첨단산업 분야 투자를 명분으로 금산분리 완화를 주장하지만, 구체적 내용을 들여다보면 전혀 관계가 없다”며 “명분으로 이야기하는 것과 구체적 내용이 전혀 다른데도 디테일이 어려우니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넘어간다”고 지적했다.

금산분리는 크게 은산분리(은행과 산업자본 분리)와 비은행 금융기관의 금산분리로 나뉜다. 현행 공정거래법은 지주회사 체제에서 금융회사와 비금융회사를 동시에 소유할 수 없도록 소유 분리를 규정하고 있다. 비지주회사 체제의 대기업집단은 소유 규제는 없지만 의결권 제한이 있다. 다만 1986년 도입 당시 의결권을 전면 금지했던 것과 달리 지속적인 완화로 현재는 상당 부분 약화된 상태다.

박 교수는 “금산분리가 필요한 이유는 금융기관과 산업자본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라며 “금융기관은 위험 평가와 관리를 주로 하고, 산업자본은 위험을 감수하고 투자하는데 이 둘이 한 기업집단 동일인 수중에 통제되면 금융의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고 도덕적 해이가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계열 금융회사가 계열사에 대해 충분한 위험 평가를 할 수 없고, 비금융회사의 부실이 금융 계열사까지 전이돼 기업집단 전체가 무너지며 시스템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2013년 동양그룹 사태가 대표적 사례다. 당시 동양그룹은 계열 금융회사인 동양증권을 통해 고금리 회사채와 CP를 발행하며 “절대 괜찮다”고 속여 팔았다. 결국 4만1000명이 피해를 입고 피해 금액은 1조6000억원에 달했다. 박 교수는 “동양그룹 같은 크지도 않은 재벌이 금산분리가 안 돼서 나타날 수 있는 피해가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예시”라고 지적했다.

금산분리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경우 1933년 증권법, 1940년 투자회사법 등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박 교수는 “미국은 80년 된 법으로 제도적 기반을 만들었는데 우리는 40년 됐다고 낡았다며 허물자고 한다”며 “재벌 규제를 제대로 안 했으니 이제 제대로 하자고 말해야 하는데 40년 됐으니 풀자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박 교수는 과거 지주회사 규제 완화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2007년 지주회사 규제 완화(출자단계 2단계→3단계, 지분율 하향 등)가 이뤄졌을 때 SK그룹은 이를 활용해 지배구조를 재편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주회사 전환 전 SK에 대한 지분이 1.02%에 불과했으나, 지주회사 전환 과정에서 물적·인적 분할, 자사주 활용 등을 통해 SK C&C의 주식 SK 지분을 11.16%에서 25.42%로 높였다.

박 교수는 “이미 지주회사 체제 전환의 혜택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금산분리 완화를 요구하는 상황”이라며 “노무현 정부가 출자단계 규제를 완화했다면 문재인 정부는 금산분리 관련 규제를 완화했다”고 설명했다.

문재인 정부 시기에는 인터넷전문은행 특례법으로 은산분리에 일부 예외가 만들어졌고, CVC 허용을 명목으로 공정거래법 지주회사법이 개정됐다. 박 교수는 “CVC는 현재도 사내부서에서 100% 가능하고 벤처지주회사를 통해 5~15% 지분까지 가질 수 있다”며 “외부 자금을 조달하는 형태의 CVC를 허용해달라는 요구는 전략적 투자보다는 금융업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전략적 투자를 하는 글로벌 CVC들은 기업 전략이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100% 자기 돈으로 운용한다. 박 교수는 “외부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은 CVC 본래 취지와 다르다”고 설명했다.

이어 SK하이닉스의 반도체 투자 자금 조달 방식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박 교수는 “SK하이닉스 같은 우량 반도체 기업이라면 오픈마켓에서 신주를 발행하거나 채권을 발행해 가장 낮은 비용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며 “CVC를 통한 프라이빗 펀딩은 상대적으로 비용이 높은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시장이 인정하는 수익성 있는 투자라면 신주 발행 시 주가가 상승하게 돼 있다”며 “일반 투자자들에게 신주를 발행해 시장에서 그 이익을 나눠가질 기회 대신 특정 경로를 통해 투자가 이뤄진다면 주주 이익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 혁신 생태계 구축이 먼저...금산분리 완화는 시기상조

박상인 교수는 진정한 혁신 생태계 구축을 위해서는 금산분리 완화가 아니라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OECD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는 글로벌 핵심 네트워크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연계가 가장 부족하다. 박 교수는 “전속거래와 기술 탈취, 단가 내려치기가 만연한 상황에서 무슨 오픈 이노베이션이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했다.

박 교수는 “강력한 징벌적 손해배상과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이 필요한데 정부는 이것만은 안 들어준다”며 “경제력 집중을 해소하고 기술 탈취를 막아야 벤처캐피탈도 되고 혁신도 일어난다”고 말했다. 

아울러 “재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차등의결권 주식인데 이를 통해 4대 세습을 하려는 것”이라며 “문재인 정부가 그 길을 깔아줬는데 이재명 정부가 그 길을 이어받지 않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AI 투자와 금산분리를 둘러싼 논란의 본질이 명확히 드러났다. 학계 전문가들은 CVC 규제 완화가 혁신 생태계 구축이 아니라 특정 재벌의 지배력 강화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을 경고하며, 진정한 혁신을 위해서는 오히려 경제력 집중 해소, 기술 탈취 방지, 민간 VC 역할 강화 등이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정위가 충분한 국민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신중하게 접근하겠다고 밝힌 만큼, 향후 금산분리 완화 논의는 더욱 치열한 공방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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